<닳아지는 살들>은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 중 하나로, 한국 전쟁 이후의 혼란스러운 사회상과 인간성의 상실, 그리고 고독한 현대인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작품은 1950년대의 서울을 배경으로 하며, 전쟁의 상처와 그로 인해 변화된 인간관계, 그리고 물질적 욕망과 도덕적 갈등 사이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낸다.
이 작품은 뚜렷한 사건의 전개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인물 간의 대화 역시 특정한 맥락에 따라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자칫 지루한 작품으로 평가받기 쉽다. 따라서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는 하나의 상황에 놓인 여러 인물들의 내면 풍경과 이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읽어 내는 데에 달려 있다. 또한 휴전선 이북에 있는 맏딸의 귀가라는 허황한 상황에 대한 인물들의 대처 방식과 이에 대한 작가의 태도에 주의하면서 읽어 보자.
1. 작품의 배경
<닳아지는 살들>은 1950년대 한국 전쟁 이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도시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전쟁이 가져온 물리적, 정신적 상처가 배경에 깔려 있으며, 이는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가치관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2. 줄거리
맏딸이 또 밤 열두 시에 돌아온다고 하여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은행에서 은퇴하고 지금은 반 백치가 되어 버린 아버지를 며느리 정애가 보살피고 있고 곁에는 막내딸 영희가 나란히 앉아 있다. 그때 쇠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집요한 쇠망치 소리를 들으며 영희는 그 소리를 덮으려는 듯 언성을 높여 조잘거린다. 영희는 정애가 아버지를 극진히 모시고 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식구들이 숫제 다 헤어져 버리자고도 제안한다. 오빠 성식이 응접실로 내려오자 영희는 오빠에게 빈정거린다. 영희는 오빠를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도 무식자인 채 막연히 작곡가를 꿈꾸며 사는 무기력한 인간이라고 규정한다. 그래도 오빠는 안경알만 불빛에 번쩍거릴 뿐 말이 없다.
열 시가 넘었다. 성식은 콜라를 마시다가 담배를 꺼낸다. 아버지는 물끄러미 시계를 건너다본다. 정애는 말이 없다. 영희는 이렇게 방관만 하며 살 일은 아닌 것 같다며, 이런 생활을 이제 그만두고 집을 처분한 뒤, 아버지가 빨리 세상을 떠나시도록 하고, 언니도 오빠와 이혼해서 둘이 함께 살자고 정애에게 말한다. 멀리서 쇠망치 소리가 또 들려 온다.
식모는 대문 밖에 선재가 와 들어오지 않고, 영희를 차고 있다고 전한다. 영희는 술 취한 선재의 등을 두드려 주다가 그의 등에 살며시 기댄다. 선재는 영희에게 오늘 밤 당장 이 집을 나가 버리자고 말한다. 영희가 선재를 데리고 선재의 방으로 올라간 뒤, 성식은 계단을 향해 간다. 정애는 성식을 부른다. 그래도 성식은 계단을 올라 아득히 멀어져 간다. 정애는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영희는 선재에게 취하면 싫다고 하면서 조잘조잘 말을 한다. 영희는 선재의 품에 안긴다.
영희는 오빠의 방으로 가, 방금 선재와 결혼했따고 말한다. 성식은 말없이 담배만 피우고 또 쇠망치 소리는 들린다. 영희는 정애에게, 우리가 왜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무료한 일상에 대해 말한다. 정애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성식이 내려온다. 영희는 혼자 있기가 심심해서 같이 기다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벽시계가 열두 시를 치기 시작한다. 문이 열리며 식모가 들어온다. 변소에 다녀오는 길이다. 순간 영희가 발작이라도 일으키듯이 아버지를 부축하며 식모를 향해 말한다. "아버지, 언니가 왔어요. 이제 정말 우리 집 주인이 나타났군요. 됐지요?"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 아버지는 손을 허공에 내젓고, 정애와 성식이 엉거주춤 일어선다. 그 쇠망치 소리가 들린다. 밤새 이어질 모양이다.
3. 주제와 특징
- 주제:
- 전쟁이 개인과 사회에 남긴 상처와 소외감
- 물질주의와 현대적 삶의 부조리
- 인간관계의 파편화와 도덕적 타락
- 문체와 표현:
이호철은 간결하고 사실적인 문체로 작품을 전개한다. 감정적인 표현을 자제하면서도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를 깊이 있게 그려내어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전후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인간성의 상실과 물질주의적 삶의 비참함을 생생히 드러낸다.
4. 작품의 의의
<닳아지는 살들>은 한국 문학에서 전후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으며, 전쟁이 개인과 사회에 미친 영향을 심도 있게 탐구한 작품으로 주목받는다. 이호철은 이 작품을 통해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와 회복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당시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은 단순히 전쟁의 피해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변질되고 상실될 수 있는지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중요한 텍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맏딸의 귀가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 작품에서는 온 가족이 맏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맏딸의 귀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단지 70세가 넘은 아버지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일 뿐 현실화될 수 없는 사건이다. 맏딸은 휴전선 이북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딸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은 역으로 딸을 찾아 이북으로 가고 싶어하는 마음에 다름 아니다. 이에 대한 식구들의 반응은 '언제나처럼' 밤 12시까지 시간을 때우면 된다는 식이다. 아내를 잃고 사리 판단조차 흐려진 아버지의 간절한 염원에 대해 누구 하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나 동정을 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상으로 파고든 분단의 상처>
이 작품은 한 가정을 무대로, 20년이나 돌아오지 않는 맏딸을 기다리는 초조한 상황을 소설화한 것이다. 작가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속편 격인 <무너 앉는 소리>와 함께 안톤 체호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꽝 당 꽝 당'하는 쇠붙이 소리를 배경음으로 하여 분단의 비극이 한 가정에 가져다 준 정신적 고통을 상징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호철 문학의 뼈대는 '실향 의식'이다. 이 작품 역시 이러한 실향 의식을 밑바닥에 우울하게 드리운 가운데, 그 실향 의식이 한 가족의 이상야룻한 행태들 속에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이 소설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쇠망치 소리이다. 멀리에서 은은하게, 그러면서도 식구들의 내면을 콕콕 쑤시면서 들려오는 이 소리는 바로 외부의 소리이며, '맏딸'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즉, 쇠망치 소리가 집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집 안의 내부를 비집고 들어오는 소리이며, 그 소리에 의해서 모든 식구들이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것과, 맡딸이 현재 집안의 일원으로 자리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들 집안의 암울한 분위기를 가져다 준 요인이 되며 모든 식구들이 그것 때문에 황폐해져 간다는 것이 이 둘의 공통점이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뚜렷한 사건의 전개가 없고, 등장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 역시 한결같이 단절된 마음의 벽을 느끼게 해 준다. 특히, 등장 인물들 간의 심리적 갈등은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야기는 겨우, 영희가 주절거리는 말에 의해서만 진행되고 있다. 마치 성격극과 같은 인상을 주는데, 그렇게 때문에 이 작품은 내면 의식의 흐름이 중심이 된다.
이 소설의 기본틀은 '기다림, 기다림의 좌절, 기다림을 재촉하는 쇠망치 소리'로 본다면, 이 가족은 또다시 끝없는 기다림의 늪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세월 속에서 가족 간의 유대감은 점점 마멸되어 제목 그대로 '살이 닳아지는' 아픔만이 남게 될 것이다.
'현대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0) | 2025.02.23 |
---|---|
김소진의 '쥐잡기' (0) | 2025.02.20 |
전영택의 '화수분' (1) | 2025.02.16 |
장용학의 '요한 시집' (0) | 2025.01.29 |
최서해의 '탈출기' (0) | 2025.01.27 |
이무영의 '제1과 제1장' (1) | 2025.01.26 |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0) | 2025.01.26 |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0) | 2025.01.25 |